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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공기, 대기 ... 이어지는 생에 관하여

​허호정(뮤지엄헤드 큐레이터)
 

지각의 방식에도 역사가 있다. 세계를 보고 듣고 이해하는 일은 개인을 넘어 집단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감응된다고도 말한다. 옆 사람에게 손을 건네 이야기를 전하고, 멀리서 온 이야기를 라디오로 듣고, 다 같이 앉은 극장에서 함께 보는 등 다양한 소통의 방식이 있다. 감응 역시 집단, 세대, 시대에 고유한 방식을 통한다.

전하려는 메시지를 종이에 손수 남기고 그것을 또 직접 운반해야 했던 시대의 “집단적 신경감응(kollektive Innervation)”[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무형의 플랫폼에 실시간으로 글과 이미지를 업로드하고 송수신할 수 있는 시대의 그것과 결코 같을 수는 없다. 이는 오늘날 엄연히 공존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매체(medium)를 단순 비교하는 얘기가 아니다. 한 시대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고유한 지각 방식이 있고, 그것은 물리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령, 휴대폰이 아닌 수첩에 메모를 남긴다 해도, 이메일이 아닌 손 편지를 전달한다 해도, 오늘날의 지각은 모든 정보의 디지털 전환, 클라우드에 연동된 실시간 업로드(의 가능성)를 전제한 채 이루어진다. 감응을 매개하는 형식, 사태를 지각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 자체로 역사화된다.

또, 지각의 방식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변화하거나 고정된다. 철학자들이 ‘아우슈비츠 이후’를 말하는 것, 한국의 평자들이 ‘세월호 이후’를 말하는 것을 위의 맥락에 겹쳐볼 수 있다. 어떤 사건의 경험이 그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들—개별 경험의 편차와 무관하게—에게 공유되고, 사건 이전과 이후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심연이 놓인다. 절대 전과 같을 수 없다는 직관적인 감각이 사람들을 가로지른다. 세상을 보고 느끼는 방식에 그러한 감각이 끼어든다.

예술 작품은 역사적/동시대적 지각 방식을 단적으로 예시해 왔다. 회화나 조각 등 오래된 전통 매체도, 뉴미디어도, 지시적으로 주제를 명료하게 밝히든 아니든, (참된 의미에서의) 작품은 그 시대의 지각 방식에 공명하며 감응을 촉발한다. 때로는 시대착오적으로, 지난 날의 유산을 오늘에 들춰보면서 지금에 팽배한 어떤 지각 방식을 뒤흔들어 놓기도 한다.

잠시, ‘감응’의 사전적 의미에 ‘빛 · 열 · 전기 · 자기장 따위의 영향으로 유도된다’는 뜻이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어쩌면 작품들은 말 그대로 감응을 유발하는 무형의 장을 두르고 나타나 거기에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작품 앞에서 사람들의 몸이 동요하고, 누군가는 찌르는 듯한 느낌을 얻기도 하며, 신경이 곤두서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는 스펙터클 시대의 현란한 조명, 실시간 네트워크 및 가상현실 체험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20세기 벽두에 쓰인 예술 비평 텍스트들을 연구한 잉그리드 크리스찬(Margareta Ingrid Christian)은 작품이 어떤 공기(air)를 포함한다고 본 유수의 입장들을 발견한다.[i] 이에 따르면, 작품(그리고 그 매체)은 공기로써(서) 관객의 피부 가까이로 진동하고 확장된다. 크리스찬은 이들 텍스트에 덧붙이며, 감응이 관객 쪽이 아니라 작품에 귀속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작품과 공기와 감응의 문제에 관해선, 작품을 누가 어떻게 읽느냐 하는 수용론이 중요하지가 않다.

공기, 그것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의 공간이기도, 조각 작품의 양각의 틈이기도, 초기 사진에 남은 희뿌연 흔적이기도, 스푸마토(sfumato)와 같은 기법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의 공기-매체적 속성은 ‘작품(work-of-art)’의 내적 완결성이라는 오랜 신념을 흔든다. [작품을 둘러싼 공기라는 것이 아우라(aura)를 연상케 함에도 불구하고, 공기는 작품을 신탁에 올려놓는 대신 사람들을 향해 열리도록 운동한다. 이러한 접근은 개별 매체/작품의 지각을 ‘작품’의 물리적 경계 너머에서 다루도록 한다.

 

이제의 회화는 자주 흔들렸고, 여전히 흔들린다. 그 안에는 언제나 공기가 있고, 작품은 공기를 통해 바깥으로 열린다. 바람, 밤, 웃음, 춤과 같이 무형의 것을 그리곤 했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도 빈 공간과, 거기를 채우는 공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이 공기는 감응을 가능케 하는 지각의 조건으로 작동하며, 사건 이후와 매체의 현실(혹은 환경)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토기’는 작가의 그림에서 공기를 상징하는 주요 모티프였다. 2017년의 개인전 《손목을 반 바퀴》(갤러리조선, 서울)에서 작가는 처음으로 ‘토기’ 시리즈를 선보였다. 흙으로 빚어 만든 둥근 ‘알’ 형태의 토기를 제주에서 처음 마주했던 이후, 작가는 ‘입, 숨, 숨구멍’을 연상케 하는 그것을 자주 그림에 등장시키고, 때로는 실제 토기를 전시장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서 본 대로라면, 이것은 정확히 기능을 가늠하기 힘든 그저 둥근 사물이다. 그것은 여자의 가슴 같기도, 숨을 쉬는 작은 생명체 같기도, 소리를 내는 악기 같기도 하며, 부풀어 바람을 통하게 하는 듯 공기의 심상을 전한다.

〈우리의 춤은 늘 뜻밖에 찾아오지〉(이하 〈우리의 춤〉, 2017, 2018, 2020, 2021)는 같은 제목과 주제로 여러 번 반복되어 그려졌다. 모두 춤추는 군상을 보여주는 그림인데, 사람의 실루엣이나 인물의 표정이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2018), 대개의 그림에서 사람들, 몸짓, 여럿이지만 하나로 묶이는 공동의 형상은 세밀한 묘사 없이 다만 ‘분위기’로 표현된다. 일례로, 2020년 작 〈우리의 춤〉은 저 안쪽에서 춤추고 있는 무리들보다도 그들을 감싼 희뿌연 공기를 더 강조하고 있다. 이 공기층은 작가 특유의 색, 붓질로 표현되어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춤”이 가진 순수, 자유, 연대의 가능성을 그림 안팎으로 넘나들게 하는 대기를 형성한다.

《밤의 유산》(2024)[ii]은 그러한 공기, 대기, 분위기를 반복하고 또 연장해 보여주는 전시다. 어쩌면 그것이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된 결과, 작가는 그간 천착해 온 ‘회화’ 매체의 물리적 반경을 넓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리듯 영상을 만들고, 영상을 다루듯 그림을 그렸다.”는 작가의 말처럼, 전시에는 ‘회화’들 외에도 “회화하기”(작가의 말)의 확장된 영역에서 다뤄진 배너, 영상, 사진적 이미지, 그리고 협업 사운드 작업이 등장한다.

우선, 〈세계는 계속된다〉(2024~)는 작가가 현재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할 회화 연작이다. 제목이 시사하듯 이 연작은 미래시제로 세계의 지속, 역사, 연장을 내다보고 그 진행을 앞을 향해 던진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정방형의 캔버스를 고수한다. 이전에도 비슷한 크기의 캔버스들을 연작으로 선보이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일정하게 반복되는 ‘정방형’ 이미지는 새로운 과제로 다가온다. 그것은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같은 모양이라는 점에서 원에 가깝고, 그러한 순환의 구조는 캔버스 틀의 사각 진 제약으로부터 그리기를 자유롭게 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형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게 되고, 회화는 그리기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개방한다.

특정한 인물, 장소, 사물을 담은 작가의 이전 작업들을 떠올리자면, 이 연작에서 어떤 추상성이 도드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는 단박에 ‘추상적’이라 말할 화면들이 있다. 거기엔 구체적인 형상-기호가 부재하지만, 그러한 형상 없음이 곧 의미의 상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추상적 그림들은 〈세계는 계속된다〉의 전체 구성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작가가 단일 캔버스를 완결된 하나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정 크기의 캔버스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작가는 그것들 사이의 호흡을 가다듬으려 하고, 한번 형상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렸다면 그새 놓쳤을지도 모를 ‘분위기’를 다른 그림으로 연이어 시도한다. “형상 이전의 단계”(작가의 말)에 집중하는 추상적 화면은 전체 연작의 맥락 안에 놓이며 그림들 사이에 공기의 통로를 내곤 한다.

같은 연작에는 작가가 촬영한 영상의 스틸-이미지를 추출해 캔버스에 전사하고 다시 그린 〈세계는 계속된다: 숲에서〉(이하 〈숲에서〉)가 포함된다.[iii] 이 그림들은 ‘캔버스에 오일’ 류의 전형적인 회화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난다. 대상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하고 이미지로 출력하는 ‘사진적 이미지’는, 형상의 드러냄과 감춤이 시간의 전개에 따라 쌓이며 비교적 천천히 이루어지는 회화에 비해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다. 작가는 이전에도 사진을 참고해 그리기를 한 적이 있지만, 거기에 의존하지 않고자 결국에는 사진을 배제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밤의 유산》, 〈숲에서〉에서 사진은 전면에 등장하고, 캔버스에 직접 출력되는 방식으로 회화 내부를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가 새로운 듯하지만 또 새롭지 않은 것은, 이 역시 앞서 언급한 ‘공기’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iv]

〈숲에서〉는 ‘네이키드(naked)’를 연구하는 동료 예술가들과 이제가 서울에 위치한 산의 한 뒷면으로(일반 등산로의 정해진 길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들어가 찍은 영상 작업의 스틸-이미지를 가져온 것이다. 작가는 고요가 찾아들 일 없이 소란한 도시의 한 가운데, 사람들의 눈 바깥에(뒤에) 숨은 숲을 찾고, 그 안에서 땅과 밀착해 걷는 몸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벗은 몸은 숲 안에서 다른 호흡을 획득한다. 개인화된 신체 사이에 발생하는 일상적인 긴장들—성징, 의복, 자세가 유발하는 사회적 기호들—은 희석되고, 대신 웅크리거나 펼친 몸동작의 의미가 더 커진다. 카메라는 그러한 동작을 빠른 속도로 포착하고, 작가는 이를 다시 캔버스로 옮겨오면서 몸과 몸, 몸과 숲 사이 간격이 두드러지는 장면을 고른다.

이때, 전사된 사진 이미지 표면에 ‘다시-그리기’는 사진에 형상을 보태는 식이 아니라, 표면에 한 겹 막, 공기층을 생성해 내는 식으로 진행된다. 공기층의 형성은 사진을 전사하는 방법에서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사진에 용해제를 바르고, 프레스기로 눌러 천에 잉크를 염색하듯 스며들게 한다. 그리고 그 위로 ‘아교-오일스틱-밀랍-오일스틱’의 층을 교차해 질감을 표현한다. 그 결과, 덧발린 색은 사진 이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낼지도 모를 벗은 살을 표면에 눌러 앉히고, 몸의 이미지가 전체적인 공기 속에 균질한 분위기로 녹아나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춤은 늘 뜻밖에 찾아오지〉가 연상되는 것이 무리는 아닐 테다.)

복도에서부터 공간을 횡단하여 펼쳐진 설치 작업 〈강〉(2024)은 작가가 사진적 이미지를 전사 방식으로 활용한 또 다른 사례다. 작가는 도심의 광장을 지나다 우연히 보게 된 광경을 촬영하고 이를 실사이즈로 떠내듯 커다란 천에 전사했다. 작업에서 우선 보이는 것은 네모난 포스트잇 종이가 가득 붙은 벽면이다. 그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도시의 풍경으로, 곳곳에 주장하는 말 · 동조하는 말 · 그리워하는 말 · 위로하는 말을 담고 서 있다. 사진 촬영된 이미지에서 ‘포스트잇 벽’이라는 기본적 지시성은 유지되지만, 그것을 프린트하는 과정 중 직접적인 장소성은 지워지고 풍경으로서의 거리는 좀 더 확보된다. 명확하지 않은 말들의 겹침, 이따금 침묵, 그렇게 생성된 리듬이 사진의 구체적 지시성과 프린트의 평면성 사이를 오간다. 물론, 이 벽은 몇몇의 구체적인 사회적 재난, 그 사건을 기억하게 한다. 때문에 〈강〉은 재난 이후의 사람들이 분유하고 있는 감정을 먹먹하게 전하며, ‘어디선가 본 그 벽’이라는 기시감을 유령 같은 장막으로 펼쳐 놓는다.

한편, 그림 · 사진(영상) · 소리 · 춤이 그야말로 한데 묶이는 작업은 전시장 가장 안쪽 공간에 영사되고 있는 〈그리는 마음〉(2024)이다. 이 작업은 작가가 중학생 아이들과 진행한 워크숍 장면을 담고 있다. 새하얀 공간에 꿈틀대며 등장한 몸들이 벽과 바닥을 바탕 삼아 목탄을 쥐고 그림을 그린다. 목탄을 쥔 손은 금세 검게 변한다. 손과 얼굴, 새하얀 티셔츠 위로 검정 분진이 날린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검댕을 묻히고, 글자와 모양을 벽에 새기며, 그것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덮이고 더럽혀지는 것에는 개의치 않는다. 자국들. 작은 손을 커다란 벽에 대고 쓸어내고 더듬는 동작들이 영상에 담긴다. 그리기의 동작은 춤이 되고, 그것은 또 그림이 되며, 그 위에 겹쳐지는 허밍과 두드리는 소리, 웃음소리는 다시 커다란 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자막으로 등장하는 내레이션에는, “아이야,” 하고 부르는 말이 있다. 거기엔 순수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결국 다칠지라도 생을 긍정하길 바라는 마음, 이미 어떤 시기를 지나온 자의 미래의 편에서 내다보는 애틋한 마음이 실린다. 그런 한편, 사춘기에 놓인 이들의 과감하면서도 수줍어하는 몸짓들은 원형의 시간성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그리기’라는 시원적(始原的) 행위를 중심으로 시간을 재조정하며, 미래의 편에서 내다보는 시선을 거두게 하고(“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어리석음이란!), 어떤 ‘정상 단계’의 이전으로 설정되는 미분화, 미성숙을 재고하게 한다. 그것은 시간의 일방향성을 잘라낸다.[v]

 

“자기-충족성의 지속적인 거부(persistent refusal of its own self-containment)” [vi]로 정리되는 회화의 오래된 동시대성이 현재 전시의 다매체적 시도를 해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서 작동하는 ‘대기’와 맞물린다. 한편, 이제껏 언급된 숨 · 공기 · 대기이자 분위기는 모두 작가의 ‘생’의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는 끝이나 단절을 보지 않고, 앞을 내다보는 생에 집중한다. 따라서 그는 애도의 메시지가 가득 담긴 벽을 마주하고도, 그것이 한치도 나아지지 않은 현실의 벽이 되기보다 기억을 싣고 흐르는 “강”이 될 것을 먼저 보고 또 바랐을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확보하는 지각의 방식은 더 이상 전처럼 작동하지 않는 어떤 (집단적) 감응을 시도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점점 빠른 속도로 갱신되는 재난의 (일상적) 감각에 현재적으로 반응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작품과 작품 사이, 전시장에 마련되는 공간이 있고, 작품 안에 마련된 공간도 있다. 이 공간은 비어 있지 않고 공기와 분위기로 채워진다. 공기는 개별 작품을 외떨어진 섬으로 두지 않고 전체 전시 안에서 호흡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하며, 이미 보는 이를 감응시키는 매질이 된다. 그것은 작가가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 질료, 이미지, 장치, 감각들에서 유래할 뿐 아니라, “공동의 기억과 알 수 없는 개인의 비밀들 사이의 연속과 단절”이자 “시차”(작가의 말)로부터 비롯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기의 흐름과 교환은, 표면을 두드려 내는 소리(타무라 료)가 전시장을 감쌈에 따라 강화된다.] 다만 눈으로 볼 뿐이지만 우리는 작품에 접촉했다고 느낀다. 전혀 구체적이지 않아 보이는 희뿌연 장면에서 통각을 느끼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숨 · 공기 · 대기를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밤의 유산”이다.

[i]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미술사가인 알로이 리글(Alois Riegle)과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등의 저작이 해당된다. Margareta Ingrid Christian, Objects in Air (Chicago : Chicago University Press, 2021).

[ii] 전시 제목인 “밤의 유산”은, 유튜브 방송에서 1세대 성우 모 씨가 인터뷰 중 한 말에 착안한 것이다. 방송에서 그 목소리는 지난날의 “유산”으로부터 자기 작업을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서 “유산”은 뿌리를 찾는 가부장적 계보를 상기시키는 말이기보다, 복수의 시간과 역사 안에 놓이기 마련인 ‘오늘’의 다층성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그러한 유산을 어제의 광명이 아닌 밤의 어스름, 정확한 근원을 찾기 힘든 모색의 시간 와중에 찾는다.

[iii] 이제는 민정기의 1986년 연작 〈숲에서〉에서 제목을 가져왔음을 밝힌다. 민정기의 작품은 세명의 남녀 모델을 고용해 여름산에 들어가 사진 작가와 협업해 찍은 촬영본을 바탕으로 인물을 누드로 재구성한 석판화다. 여기서 ‘숲’은 1980년대 중반 억압된 사회 현실을 벗어난 금기의 영역으로 상정된 것으로 전한다. 관련 정보는 SeMA 소장품 정보 페이지에서 확인: https://sema.seoul.go.kr/kr/knowledge_research/collection/collection_detail?artSeq=WORK_0000005104&soOrd=old&collSYear=&collEYear=&showArticleCount=50&artCode1=ALL&kwdValue=&soHighlight=&wriName=%EB%AF%BC%EC%A0%95%EA%B8%B0&artKname=%EC%88%B2%EC%97%90%EC%84%9C+9&kwd=KWNAME.

[iv] 여기서 사진적 이미지는 회화 내부의 구성력을 밖으로 확장하게 하는 분명한 경로다. 사진이 대상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오래된 믿음은, 카메라-대상세계-프린트(출력된 이미지) 사이에 어떤 개입/틈도 허락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공간을 전제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믿음인지도 모른다. 사진에는 이미 대상-이미지를 둘러싼 공기가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v] 여기 언급된 시간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시간성에 관심이 있는 나는 사춘기 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발달론적 모델에서 사춘기나 아동기 섹슈얼리티는 예비적인 것으로서, ‘진짜의 것’ 이전에 오는 것이지만, 여기서 시간성의 흐름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앞으로 갈 수도 있고 뒤로 갈 수도 있다. 귀환은 미완결의 흥분이 스며든 이해를 동반할 수도 있다. 성교 이전만이 아니라 이후 모두 포함할 때 성 발달의 목적론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제인 갤럽,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 김미연 옮김(서울: 현실문화, 2023), 150.

[vi] Caoimhín Mac Giolla Léith, “Surveying Contemporary Painting,” CIRCA, no. 109 (Autumn, 2004):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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