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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억술

권진
 

  본능과 자연은 같은 단어로 이해될 때가 있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법칙은 동물과 생태계 관찰 다큐멘터리의 주요 서사를 이끄는 원리이기도 하다. 미국의 문학가 존 윌리엄스(1992-1994)는 소설 『부처스 크로싱』(1960)에서 인간의 동물적 본능과 교차하는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세상의 원천’을 찾으려 하지 않고 외면하는 도시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선, 희망과 활력’을 찾아 무작정 미국 서부의 자연으로 찾아 들어와 들소 사냥대를 꾸린다. 인적이 드문 콜로라도 계곡에서 거행된 들소 몰기, 들소 가죽 벗기기 같은 사냥의 구체적인 묘사는 인간의 잔혹함을 거침없이 드러내는데, 광기에 가까운 상태에서 살인 자체에 몰입하는 장면들을 읽다 보면 눈살이 찌푸려 지면서 동시에 사냥꾼이 집착하는 살생의 자력에 끌리는 양가적 감정을 부정하기 어렵다. 동시에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자연으로 인해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재난의 장면에서 찰나로 결정되는 생과 죽음의 운명이 결국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힘을 상기시킨다. 이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한국의 시인 김혜순은 아시아 여행기 『여성짐승아시아하기』(2019)의 서문에서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간을 통해 축적된 위계나 체계적 인식의 밖에서 자청하고 ‘불안을 투척하는 존재’[1]로서 ‘여자하기, 짐승하기, 아시아하기’는 미술가 이제가 말하는 ‘회화하기’와 연결지어 생각하게 한다. 21세기 동아시아의 한국에서 미술을 업으로 살아가는 여성이 구축하는 미적 세계에는 합리성과 이성의 논리에 앞서 작동하는 본능, 잠재성과 무의식의 원리가 있다. 그것은 이행적이고, 경험적이며, 계속해서 움직이는 정서로서 미술의 질료가 된다. 따라서 그의 미적 세계에서는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감각하는 작가로서 문제의식과 더불어 동시대 미술의 생존 문제, 자생적인 미술 언어의 탐구,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여성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지는 공적이고 비평적인 의식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제 작가의 열 번째 개인전 《밤의 유산》(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전시실, 2024-2025)은  여러 방면에서 그동안의 행보와 다른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작가의 지난 궤적을 되감아보면, 한국의 정치적 이행, 대중문화의 번성과 국제화가 급속도로 전개된 1990년대를 거쳐 본격적인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디지털 감성이 퍼져나간 2000년대 중반,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원 졸업 직후 조흥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우리의 찬란한 순간들》(2005)을 통해 데뷔한 작가는 이후 10여년 간 주로 도시 풍경의 사실주의적 구상 회화를 중심으로 유연한 붓질과 물감 운용의 효과를 탐험하며 도시 풍경의 숨겨진 주체들을 주목한다. 당대 서울의 미술풍경은 1990년대 말부터 등장한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제도권 바깥의 실험과 자생적 네트워크가 무르익어 가던 시기이다. 현장의 미술인들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하며 사회적이고 지적인 감수성을 나누었고, 신진작가 지원 제도는 청년 작가들이 학교 이후의 활동을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는 터전을 열어준다. 동시에 디지털카메라의 상용화나 인터넷 민주주의 운동과 같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전 세대와 다른 사고방식과 매체 실험을 모색하는 동기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밀레니엄이라는 시대적 국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제도적 변화는 물론 무의식적으로도 강력한 양가적 가치를 심어준다. 미래에 관한 막연한 희망과 동시에 급속도로 진행되는 경쟁 사회의 소비주의적 가치에 던져진 당대의 청년 작가들은 유년기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과거의 풍경과 접속되지 않는 현재를 살아가며, 실체가 없는 기대감과 파편적 과거를 향한 향수병을 동시에 앓았던 것 같다. 이제 작가의 활동 초기에 생산된 작품들은 사라져가는 도시 풍경을 마치 자화상을 그리듯이 응시하고 묘사한다. 내가 누구인지 규명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변화하는 나를 인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듯, 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붓은 연필처럼 빠른 속도로, 정직하고 맹렬하게 움직인다.[2] 이후 작가는 화환 배달 오토바이, 전봇대 수리 작업자, 도시의 포장마차, 이름 모를 행인과 군중, 재개발과 재건축의 장면 등 도시의 임시적 풍경을 화폭에 옮겨 나간다. 일곱 번째 개인전 《손목을 반 바퀴》(2017)를 기점으로 그의 미술 세계는 ‘몸과 추상’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오랜 시간 이어온 회화적 표현 방식이 몸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물감의 두께가 변화무쌍하고 작가의 행위적 흔적으로서 색과 면을 구축하는 표현들은 전통적인 재현적 관습이나 회화적 경계를 넘기 위한 시도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 시기부터 그의 회화적 대상이자 주제 의식이 도시의 몸, 여성의 몸, 노동의 몸, 돌봄의 몸으로 더욱 깊숙이 천착하였고, ‘몸’이라는 화두는 그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서사이고, 형상이며, 정치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전기에서 또 다른 분기점으로 기억될 듯 하다. 《밤의 유산》(2024.12.9 – 2025. 1. 19,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전시실)에서  작가는 크고 작은 재난을 상기시키는 기호와 도상으로부터 전시의 서사를 구축하고, 다양한 매체 실험을 통해 물질적이고 기술 지배적인 시대의 상황을 직면하는 미술 이미지의 급진성을 탐구한다. 이와 같은 시도를 추동하는 에너지의 중심에는 미술에서 흔히 ‘몸’으로 읽는 것, 즉 인체에 잔존하는 기억과 감각들을 끄집어내고 발화하는 육화embodiment의 과정이 있다. 이를 테면, 기억과 무의식에 각인된 이미지를 같은 규격으로 재현하는 회화/혼합매체 평면(세계는 계속된다 연작), 훈련된 퍼포먼스, 관성이 없는 몸짓과 텍스트적 발화가 충돌하는 비디오(그리는 마음), 고립된 숲 속에서 남녀의 알몸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을 리소그래피로 인쇄한 평면(세계는 계속된다: 숲에서 1~5), 몸에 달라붙은 두려움이나 절망의 기억이 재현된 설치(강) 등의 작업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서구 미학에서 말하는 ‘육화’의 기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그것이 분절되고 굴절된 지역의 미술사, 구체적으로 한국이라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배경에서 전개된 미술과 그것의 사회적 의미가 상호 독해해야만 드러나는 배경적 특질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내재된 상상적이고 무의식적인 도상, 사회적 상징, 지적인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은 정치적인 범주에서 읽을 수 밖에 없는 원시주의에 닿아 있다. 서구의 모더니즘이 이룩한 문화의 위계에서 설정된 문명적이고 합리적인 표준의 바깥에서 인종, 젠더, 계급과 민족적 차이는 미술사의 정전만으로는 읽을 수 없는 새로운 상징과 도상을 질료로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제국적 식민주의와 급속한 근대화를 거치며 한국 미술은 불가피하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미학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중/하위/고급의 문화적 위계가 불분명하고, 서구식 이해와 동양적 전통관 혹은 자발적 오리엔탈리즘과 토착적 세계관이 동시에 전유된다. 이러한 복잡성은 서구식 이론에 무작정 대입할 수도 없고, 사회적 문제나 공동체적 무의식만으로 이해될 수 없는 어려움 속에 있다. 동시에 오늘날 빠르게 전개되는 전지구적 동시성은 이와 같은 복잡성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급변하는 시대와 환경에 반응하는 작품의 위치는 절대적인 역사적 전개의 산물이거나, 반대로 ‘민족지적 현재’[3]로서 추상적 결과물만도 아닌, 고유의 시간성과 역사적인 흐름속에서 생산된 시대적 결과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전시장 입구에서 관객과 가장 먼저 마주하는 작품은 〈강〉(면 천에 리소그래피 인쇄, 혼합 채색, 기둥에 설치. 246 x 1,866 cm. 2023)이다. 두 전시실 사이의 복도를 가로질러 길게 드리워진 설치 작품은 애도의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의 물결이 형성하는 추모 공간을 재현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인 사건과 재난이 있을 적마다 사건 발생의 장소와 시청 앞 광장 등의 공공장소에는 이와 같은 추모의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사무용품이자 문구용품으로 분류되는 포스트잇은 주로 학생이나 직장인이 ‘기억’을 위한 메모의 용도로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며, 대개 한정적인 시간 동안만 남겨둔다. 온라인의 댓글 문화가 확장되어 현장으로 옮겨진 포스트잇 추모 공간은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공감과 참여의 문화에 현장성과 의례적 행위가 더해진 새로운 문화 현상이다. 과거의 대자보나 현수막과 다르게 동시대의 포스트잇은 가볍고 유연한 ‘모바일 미디어’이며, 제도가 생략된 ‘투표 용지’가 된다.[4] 한편, 불특정 다수의 감정적 메시지는 사회와 시대라는 공동체의 몸을 감싸는 ‘스킨’처럼 많은 사람이 공유했던 특정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게 한다. 작품은 포스트잇 모음이 생성했던 추모의 공간과 시간을 박제해서 가둬 두는 형식을 취하지만, 동시에 각각의 포스트잇에 적힌 텍스트가 마치 물에 젖어 흐려진 것처럼 읽을 수 없어, 작품을 사실적 재현에서 각색된 이미지로 재위치 시킨다. 각색된 이미지는 미디어와 아날로그, 과거와 현재, 현존과 부재, 죽음과 삶이라는 다층적 경계를 가로질러 부유하는 기호를 끌어당긴다. 모바일의 참여 문화가 현장의 행위로 연결되고, 과거의 임시 공간은 작품이라는 현재적 현현으로 재구성 된다. 생략된 감정의 텍스트는 주체의 부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인쇄된 부재의 이미지는 카메라가 처음 등장했던 시기 사람들이 믿었던 마법과 영혼의 논리처럼, 가시화될 수 없는 죽음을 드러내는 기계 장치가 된다.

  〈강〉은 작품의 제목이나 외형 어디에도 이태원을 지시하지 않지만, 우리의 인식과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곳과 그 시간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아마도 포스트잇 추모를 통한 애도와 위로의 적극적인 발화가 가장 두드러졌던 사건이 이태원 참사(2022) 였고, 이태원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이어지는 그 골목과 긴 골목의 벽을 채웠던 포스트잇 물결이 작품의 외적 형상에서 지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태원에서 유난히 위로의 말들이 적극적으로 발화되었던 상황을 사후적으로 살펴보면, 아마도 같은 강도의 비난과 혐오가 동시에 쏟아졌던 당시의 상황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태원은 미군기지, 다문화의 유입과 확장 통로, 퀴어와 하위문화 등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의 뜰’로 표상되는 장소이다. 이태원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할로윈 데이는 그 기원을 살펴보면 고대의 켈트족이 죽음과 유령을 찬양하며 벌인 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10월의 마지막 날, 죽은 사람이 유령이 되어 찾아오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문화가 북미로 이동하면서 특정 기호와 풍습을 생산하였고, 한국에서는 외형적으로 북미의 할로윈 축제 의식과 유사한 새로운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여기에는 세대 차이, 문화적 간극과 경제 논리의 충돌이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한국의 할로윈을 문화 제국주의나 자본주의 특수 아이템으로만 축소해서 미숙하고 철 없는 사람들이 ‘일탈’을 즐기는 날처럼 편협하게 인식해 온 것이 사실이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초등학생부터 성인들까지 하이브리드된 청년 문화를 가감없이 꺼내어 놓는 축제의 장으로 즐기고 소비한지 오래되었다. 이태원 참사는 새로운 문화에 관해 이해 방식과 무관하게 이미 진행되는 상황에 대비한 준비가 없었던 우리 일상의 무능함을 표상한다. 그리고 참사를 향한 애도에 위계가 있다는 식의 퇴행적 반응, 그것의 정치적인 왜곡과 미숙한 공동체 의식으로 확장된다. 현존의 강도를 통해 죽음을 기억해야 마땅한 추모식에서 피해자의 위패나 영정 사진 없이 모두 익명의 비존재로 전환되었던 사실은 특정 죽음을 타자화 하는 태도로 밖에 이해될 수 밖에 없다.[5]

  이처럼 전시의 서사는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과 그곳에 얽힌 죽음, 죽음과 삶의 경계를 더듬는 시도와 충동으로부터 출발한다.〈강〉이 재현하는 것은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 관계가 아닌, 사건으로 촉발된 우리의 감정이 사회적으로 작동했던 공통의 감각이다. 정동 경제 연구자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2023)에서 두려움, 고통, 증오, 공포, 역겨움, 수치심 등의 감정과 이것의 언어적 발화와 몸의 현상 간의 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논리화 한다. 그는 감정이 개인적인 소유나 상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동적 가치로 전환되고, 기호가 되며, 자본처럼 작동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이 그러하듯이, 특정 사건이나 상황에 반응하는 감정이 권력구조, 지배 이데올로기, 역사를 비가시화하고 오로지 감정으로 연결되는 개인과 집단을 재구성하여, 시민권을 규율하는 문화정치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감정을 언급하며, 의식에서 억압된 것은 정동적 충동과 같은 ‘느낌’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연결된 ‘생각’이며,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이 사회적 감정의 움직임에 연상의 과정을 수반하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느낌’은 다양한 개인의 여러 가지 의미화 과정을 가로질러 과거와 현재를 통시적으로 오가며 형상 사이를 미끄러지고, 과거의 역사를 다시 불러일으키지만, 다시 미끄러짐을 통해 특정한 대상이 감정의 원인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든다.[6] 이태원 참사를 통해 경험하거나 공유했던 여러 감정들은 이와 같은 정동 경제에 비추어 생각해볼 수 있다. 참사의 원인이 명백한 인재이고, 희생자가 젊고 어린 생명들이었다는 점에서 이태원 참사는 자연스럽게 세월호 참사(2014)와 연결된다. 그리고 감정의 대상이 공시적이면서 통시적으로 순환하면서 감정 가치가 증식하는 작용으로 이어졌다. 포스트잇 추모를 비롯해서 이와 같은 정동 경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감정은 포스트잇과 그것에 적힌 메시지 보다는, 그것이 온라인에서 순환하고 움직이면서 여러 사람들의 기억과 잠정적 생각을 끌어들여 더 많은 정동적 가치로 확장하였다. 아매드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이어 감정과 생각의 ‘주체’가 부재와 상실의 고유한 장소라고 상정한 라캉의 논의를 덧붙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되는 정동 경제에서 ‘주체(시민 혹은 국가)’는 실존하기 보다는 하나의 교차점에 지나지 않으며, (공통의) 무의식은 주체, 대상, 기호, 타자 사이의 관계성이 실체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7]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감정은 정신, 사회, 대상이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 집단의 ‘표면’으로서 물질화를 거듭한다. 집회에 참여한 특정 집단의 발언, 이것이 보도된 뉴스 푸티지, 그것을 다시 풍자하는 일러스트와 밈의 연쇄 작용은 정동적 충동을 강화하는 대신 생각과 분석을 약화시킨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지워진, 혹은 감춰진 포스트잇 속 문자들은 이와 같은 정동 경제의 물질화된 표면을 마주하게 하면서 동시에 자본처럼 작동하고 축적되었던 ‘주체’ 없는 공통의 감정을 거둬내는 시도일지 모른다. 작품이 재현하는 ‘감정의 몸’은 우리가 자동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었던 느낌을 소환하지만, 동시에 읽을 수 없는 문자는 그것에 멈춤 버튼을 누르고 물질 그 자체를 마주하게 한다. 팽팽하게 마주하는 양가적 입장은 사건 너머의 공간, 공간 너머의 시대, 시대 너머의 죽음이라는 인간 보편의 조건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동시대에서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미술에서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가 노트에서 이제는 ‘몸에 잔존해 있는 감각과 기억을 발굴하고 가시화하는 일에 집중’[8]했다고 쓴다. 오랜시간 ‘몸’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작가에게 ‘몸’은 화면에서 재현되는 몸, 시대를 살아가는 몸, 과거를 기억하는 몸, 회화를 행위하는 몸까지 다양한 ‘몸’을 아우른다. 메를로 퐁티는 유명한 저서 『몸의 현상학』(1955)에서 공간의 지각을 통해 대상을 지각하는 데카르트와 칸트식 사유의 반대에서 자신의 신체적 공간과 연결된 경험성을 설명한다. 우리가 자신의 신체를 경험하는데 있어서 경험은 단지 외피(인터페이스)이고 객관적인 공간 아래의 신체적 ‘존재’가 합쳐지는 과정을 통해 몸이 원시적 공간을 찾게 한다고 쓴다.[9] 이제의 작품 세계에서 몸은 퐁티 식으로 말하면 ‘경험하는 몸’에 관한 것이다. 미술사 정전 속의 여성 미술가들은 공통적으로 신체를 통해 젠더, 섹슈얼리티, 정치학과 시대적 알레고리를 투영해왔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배경에서 등장하는 미술적 이미지로서 신체는 그보다 더 복합적인 맥락에서 형상화 되기에, 그만큼의 다층적인 독해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를 테면, 작가 이불의 초기 퍼포먼스 작품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은 여성의 재현, 남성적 시각과 권력/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질문하는 작가적 인식이 퍼포먼스의 수행성을 통해 완성된 비판적 작업들이다.[10] 일련의 사진과 비디오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이 작품들은 19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공권력의 폭력적 사건과 관련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여성성이라는 신화적 기표나 전형적 텍스트와 대립하며,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풍자하는 몸의 정치학을 실천한다. 과거의 수행적 몸과 이제의 몸이 생성된 사회적 조건을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한편으로 유사한 정치적 장으로서 여성의 몸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번 전시에서 이제의 몸은 여성의 신체를 넘어 다양한 젠더, 신체와 정신적 외상의 메타포로서 몸까지 더 확장된 범주를 아우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외형적으로 온전한 몸을 재현하지 않는다. 〈강〉은 물론이고,  〈세계는 계속된다〉 연작(캔버스에 유채, 리소그래피 인쇄 부분. 각 130 x 130 cm. 2024)에 등장하는 다양한 몸과 몸의 메타포들은 취약하고, 끊어지거나, 삭제된 몸, 혹은 그것의 파편을 암시한다; 사고가 나서 찌그러진 자동차, ‘재난’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주인 없는 신발 더미, 남녀가 머리만을 맞대고 다른 방향으로 누워있는 ‘림보,’ 달빛이 드리운 강가를 바라보는 여성(이것은 아이러니하게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관한 풍자가 되기도 한다), 식사 풍경의 윤곽, 리어카 수레에 잔뜩 매어 있는 짐 보따리에 가려진 노동자, 모여 앉은 여성들의 발과 발목, 거칠게 마무리되어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산등성이 등은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제시한다. 구체적인 주체가 삭제된 일련의 ‘상황’들은 생략되거나 부재하는 몸을 경유하여 고유한 관점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연결과 분리를 반복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핏빛으로 물든 바닥 뒤로 색이 없이 찌그러진 자동차 이미지와 그 앞으로 피어난(혹은 시들어가는) 푸른 꽃을 통해 우리는 이 모두가 이른바 ‘충격’에 빠진 어떤 상태에 관한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술적으로 이 평면 작품에서 연속적으로 마주하는 색상과 그것의 조합은 모두 낯설고 강렬하다. 현실적인 재현과는 거리가 있는 색이며, 주로 빛과 어둠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선택된 듯 하다. 그동안 작가가 사용해왔던 ‘중간 색’보다는 원색과 보색 중심의 팔레트는 대칭과 중첩의 운동을 통해 캔버스를 빈틈 없이 채운다. 어떤 이미지들은 중심이 되는 대상을 흑백으로 처리하고, 그 주변에 혹은 그 위로 색-면을 채워서 언뜻 엑스레이 촬영을 한 필름의 네거티브 이미지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외상을 겪고 있는 세상에 엑스 광선을 비추어 눈으로 볼 수 없는 속사정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구체적인 사건의 인과 관계 보다는 존재의 현시를 강조하고 보다 기원적 주체를 찾은 몸짓, 그러니까 해방적 표현을 통한 현실 비평에 더 가까이 있다. 몸의 경험을 암시하는 여러 이미지들은 단순히 의미로 진입하기 위한 표면만이 아닌, 주변을 향해 열린 통로이자 임시적 주체가 된다. 예를 들어〈세계는 계속된다: 숲에서 1-5〉(면 천에 리소그래프 인쇄, 혼합 채색. 각 130 x 130 cm. 2024)는 한국의 리얼리즘 작가 민정기의 〈숲에서〉(1986)를 전용해서 새롭게 구상된 작품이다. 총 다섯 폭의 평면에는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숲 속 공간, 더 정확히는 바위 벽에 붙어 온 몸을 펼치고 손과 발을 모두 활용하여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남녀가 보여진다. 위태로워 보이는 돌벽의 좁은 틈을 걸어나가는(거의 기어가는 것에 가까운) 모습이 한편으로는 절박하고, 또 제의적으로도 다가온다. 검정 잉크로 전사한 이미지를 붉은 색 톤의 물감으로 한 겹 덮어 마치 꿈 속에서 본 풍경이나 빛 바랜 사진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작가는 현대무용을 연구하는 창작자 집단과의 워크숍을 통해 몸의 움직임을 익히고, 서울 북한산 기슭에서 남녀 퍼포머 **명에게 알몸의 퍼포먼스를 주문하여 기록 영상 〈제목〉 (2024)을 먼저 완성하였다. 〈세계는 계속된다: 숲에서 1-5〉는 먼저 완성된 영상에서 추출한 장면들을 파노라믹하게 펼쳐서 다섯 폭의 면 천에 리소그래피로 인쇄하고 물감으로 후작업을 더한 사진과 회화의 중간 이미지이다. 작품은 고립된 야생으로서 숲과 해방된 개인 간의 참된 관계로서 벗은 몸에 관한 탐구라는 주제만으로도 우리 미술사의 리얼리즘적 비평의식과 공명한다. 미술평론가 최민(1944-2019)은 2004년에 발표한 글에서 민정기의 〈숲에서〉를 1980년대 초반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대의 알레고리로 읽는다. 그리고 ‘공간’의 장르로 알려진 회화에서 시공간의 내적 연관관계를 통해 시공간이 결합하는 문학 구조와 유사하게 시간성을 실험한 새로운 회화적 문법을 발견하며, 당대의 집단적 무의식에 각인된 외상과 치유를 위한 도상이자 상징으로 작동한다고 쓴다.[11] 민정기의 〈숲에서〉는 이름모를 숲 속 공간에서 작가의 디렉션으로 남녀가 움직이는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해서 10 점의 석판화로 옮긴 작품이다.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 《서울의 봄》(1986)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던 이 작품은 야생으로서 숲이라는 배경 속에 던져진 인간이 특정한 목적이나 동기가 불분명한 상태로 움직임 자체를 주목한다. 민정기의 〈숲에서〉가 정면-혹은 응시자를 향해 남녀가 걸어오는 장면의 연속이라면, 이제의 작품은 응시자를 의식하지 않는 듯 연기하는 남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시점을 취한다. 민정기의 〈숲에서〉가 가늘고 촘촘하게 이어지는 선의 데생으로 음영을 쌓아 나간다면, 이제의 작품은 빛과 그림자의 화학적 작용을 통해 생겨난 작은 망점들이 마치 컴퓨터의 픽셀처럼 쌓이고 모여 형상을 드러낸다.

  이제는 작가 활동의 초년기에 보았던 〈숲에서〉가 구상적 재현이라는 민중미술의 전형성을 벗어나 초현실적인 시공간을 그려낸 점에서 오랜 시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고 술회한다.[12] 미술사적 상징으로서 〈숲에서〉를 향한 작가의 애정과 그로 인한 영향력은 이미지의 표면적인 유사성 보다는 오히려 이미지 형성의 과정을 통해 더 가깝게 유추해볼 수 있다. 이제가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감행한 매체 실험은 오랜 시간 실천해 온 회화, 즉 순수미술의 상위 매체로서 회화의 개념을 전복하고 비트는 시도로 다가온다. 우리의 삶 면면을 지배하는 미디어를 암시하는 정방형의 프레임, 퍼포먼스 기록 영상에서 추출된 이미지, 오브제로서 작품의 대량 생산 방식을 떠올리게 하는 인쇄 기법을 통해 완성된 다섯 점의 평면은 하나의 장르로서 새로운 조형수단을 찾아가는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그리고 이런 실험성은 민정기가 양평으로 이사하기 전 이발소 그림, 포토몽타주, 판화와 같은 매체 실험을 통해 인간-회화적 재현에 대항하는 기계-시각적 비전을 살펴보았던 미술사의 회귀적 버전이자, 동시대의 물질과 기술 지배적인 사회에 대항하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로 다가온다. 이제의 작품에서 붓과 물감이 구축한 형상 대신 카메라를 통해 관찰된 몸의 흔적은, 과거 사진이라는 기술 복제의 이미지가 욕망했던 대상, 육체 노동이기 전에 정신 노동을 전제로 발현되는 현대미술의 특징, 그리고 제작자로서 작가의 위치를 강조하게 된다. 벤야민은 기계 장치의 등장과 더불어 이미지가 생산되던 초기 시대, 특히 사진의 등장에 관한 저술에서 복제를 통해 사물을 자신에게 가깝게 끌어오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특정한 시공간을 통해 일회적인 현상으로서 발현되었던 아우라와 달리, 사진은 대상을 공간적이고 인간적으로 가까이 가져와서, 표면의 재생산을 통해 관객과 가까운 곳에 붙잡아 두고, 그것에 관해 알고자 하며, 나아가 소유하고자 하는 모든 것의 욕망을 투영한다는 것이다.[13] 이제가 생산한 이미지들은 〈숲에서〉의 시대적 배경과는 다른 맥락에서 오늘날 주디스 버틀러 식의 ‘위태로운 삶’에 관한 기호이자 치유적 형상으로 제시되지만, 동시에 삶의 현존을 연출하며 현재와 극명하게 구분되고 충족되지 못하는 어떤 욕망의 연쇄 작용을 투영한다. 도시의 삶을 지탱하는 모든 기호들은 부재하고,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선 숲과 벗은 몸이라는 초현실적 시공간은 미지의 해방을 꿈꾼다. 기계 장치로 생산된 복제물로서 이미지는 관습적인 회화에서 여성의 신체나 인간의 벗은 몸에 달라 붙은 전형성-껍질을 떼어내어 기존의 예술적 아우라 혹은 감춰진 의미 작용을 포기하고, 오히려 이름 없는 현상 혹은 상상의 시공간을 이끌어낸다. 관객은 ‘복제’라는, 어떤 면에서 동시대에서 더 익숙한 장치를 통해 관찰자의 위치에 서게 되며, 인체와 인체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미적 특성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옮겨와 일종의 집단적인 기술적 구성물’[14]로서 인식하게 된다.

  〈강〉에서의 죽음은 〈세계는 계속된다: 숲에서 1-5〉에서의 생명과 충돌하며 다시 또 다른 죽음 〈그리는 마음〉(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텍스트. 20분 38초, 2024)으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벽으로 둘러싼 공간에서 어떠한 제약이나 규칙 없이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십 대의 청소년 10여 명은 길게 이어지는 벽 위에 목탄으로 만화 주인공의 얼굴, ‘자유,’ ‘사랑해,’ ‘첼시 우승’과 같은 사춘기의 복합적 상징을 드러내는 낙서로 채우고, 그것을 다시 손으로 문지르는 행위를 반복한다. 같은 공간 속 그들 앞에서 훈련 받은 몸짓을 이어가는 무용수 두 명은 바닥에 웅크려서 서로의 머리, 발, 손을 맞대고 연결하며 몸들이 중첩되고 연결되는 행위를 수행한다. 이 공간에 모인 모두의 손, 발, 몸에는 목탄의 검댕이가 묻어 있고, 각자의 움직임이 더해질 수록 공간이 점점 까매진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을 기록하는 영상은 죽음과 생의 체험적 경계를 드러내는 자막-텍스트와 중첩된다. “그때였다, 내 몸이 떠오른 것은. 긴장한 팔을 위 아래로 흔들자 얇은 외투 안으로 공기가 찼다. 둥-실, 허공의 발 아래 흔들리던 슬픔이 윙윙 돌더니 광장 쪽으로 사라졌다.”[15] 사라 아메드는 미국에서 9.11 테러 이후 ‘역겨움 disgusting’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했던 것을 주목하며 여러 텍스트적 발화 현상을 분석하고, 이것을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과 연결해서 사유한다. 그는 대상과 기호 사이의 ‘환유적’ 접촉으로 인해 역겨움이 마치 객관적인 속성인 것처럼 전환되고, 동시에 몸의 경계를 넘나들며 안과 밖의 작용을 뒤집고, 경계가 대상으로 대체되는 비체화의 작용과 유사하게 역겨움이라는 감정이 권력관계의 이동을 만든다고 설명한다.[16] 여기에서 ‘역겨움’이라는 감정은 끈적임, 즉 점성의 속성으로 옮겨가, (혐오발언)과 같은 ‘기호’가 어떻게 반복을 통해 우리 사회에 끈적이고, 들러붙고,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따라서 역겨움의 대상이 된 몸이 기호로 순환되고, 끈적이게 된다. 그리고 이 기호는 순환의 과정에서 양가적 가치를 가지고 있어, 트라우마에 관한 신체적 작용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트라우마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무의식적이고 강박적인 욕망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목탄에 더럽혀진 몸들은 더욱더 자유로운 몸짓을 드러낸다. 이들은 역겨움의 감정과 무관한 감정의 이동 방식을 흥미롭게 드러내며 작은 사회의 풍경화를 그린다.

  《밤의 유산》이라는 전시의 제목에서 ‘유산’이라는 단어는 흥미롭게도 2016년에 개최되었던 9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주제 의식과 공명한다. 당시 비엔날레의 기획은 ‘전쟁, 재난, 빈곤 등 원치 않는 유산을 어떻게 미래를 위한 기대감으로 전환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17]했다고 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여년 전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비엔날레와 한 작가의 개인전에서 공통적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화, 대중 매체의 힘, 소비주의 사회와 소외로 인한 갈등과 같은 현상에 더 이상 대항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전환기의 시대에 예술의 위치나 가치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한 전제로서 우리의 현실을 상기한다. 존 버거(1926-2017)는 비슷한 질문을 20세기 초 폴란드에서 태어나 유럽과 뉴욕에서 활동하였지만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연구자 막스 라파엘의 미발표 원고를 경유하여 이야기 하였다. 라파엘은 생전에 예술이 ‘예술가와 세계, 표현수단이라는 세 가지 요인의 방정식이자 상호작용’ 이라는 테제를 세우고, 예술적 가치는 작품에 의해 드러나는 행위, 즉 주어진 대로의 세상에 대해 자연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에 대해 보편적인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18]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나 전쟁과 같은 상황, 이와 같은 극단적인 현장에서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실존적 체험과 예술은 어떤 관계를 맺는 걸까? 그것은 감각과 감정으로 연결된 정동의 공동체 인가? 혹은 끈적임의 기호로 만들어진 감정의 회로에 불과한 것일까? 감정의 물 밑에 연결되는 생각의 연쇄는 어떻게 해설될 수 있는가? 이 전시에서 제시하는 죽음의 ‘기호’들은 흥미롭게도 단숨에 슬픔이나 애통함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어딘지 이상하고, 불편하고, 뒷걸음치게 만들고, 숨기거나 덮어두고 싶은 대상을 굳이 들춰내면서, 사라 아메드 식으로 말하자면 ‘역겨운’ 것을 상기시키고, 한 번 더 목격하게 하고, 공개적인 발언을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동시에 우리 사회의 무수한 사건들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경험하고, 우리의 일상을 침투하게 하며, ‘역겨운 느낌’을 공유하는 바로 그러한 방식의 소통과 강박적 회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구체적이지 않은 주체의 부재를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인식하는 과정은 사회적 죽음에 관한 공통의 책임감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정동 경제의 순환 고리에 살아가는 동시대의 삶 전체를 향한 해방을 외친다. 퐁티는 우리의 몸 그리고 다른 몸들의 의미 작용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단순하지 않으며, 죽어가는 사람의 의식에서 조차 항상 진행중인 동시에 불확정적이며, 결국 인식의 작용 자체가 ‘발화하는 주체’가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유는 항상 앞서 있고, 자동 발사되며, 어디에서나 집처럼 적용되는 이상한 힘, 즉 그것의 자율성으로부터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19] 아마도 이 전시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상을 피하지 않고 그것을 평가하는 나를 주체로서 인식하기 위한 예술, 그래서 과거,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관객의 창조적인 힘을 대변하는 풍경으로서 예술을 제시하는 듯하다.

[1] 김혜순, 「김홍희라는 접속사 - 여성 ‘시하기’와 여성 ‘미술하기’」, 『페미니즘 미술 읽기: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 파주: 열화당, 2024. 433-439

[2] 이제, 〈혜화역 3번 출구, 오후 3시〉, 2004/2024. 4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9분 3초. 회화: 이제, 글: 강희영, 김송희, 김지현, 이제, 임현영, 목소리: 김지현, 이종현, 임현영, 제임스채, 최다은, 영상 촬영: 글림워커스, 영상 편집: 김진성, 사운드 편집: 강민석.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사전프로그램(프리비엔날레) 커미션. 작가 제공

 

[3] ‘민족지적 현재’는 과거 인류학에서 사용한 방법론적 개념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온 ‘고정된 시간’으로서 타문화를 읽는 방식을 지칭한다. 유럽의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인류학은 자연스럽게 서구 중심의 선형적 시간관에서 비서구의 원주민과 공동체를 연구하였고, 현장의 역사적 전개나 그로 인한 영향과 무관한 ‘무시간성(timeless)’의 잣대로 타자를 분석하고 일반화하였다. 동시대 미술 실천에서는 이와 같은 인류학적 범주를 비평하거나 전복하는 작업들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4] [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포스트잇, 한국일보 2016년 6월 7일 https://v.daum.net/v/JWteWYxE5R?f=p

[5] 김형식, 「좀비, 나를 죽이러 온 나의 해방자: 좀비로 보는 사회적 참사와 반란의 간략한 역사」, 『문화/과학』 2023 봄 통권 113호, 서울: 문화과학사. 199-215

[6]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역자 시우, 파주: 도서출판 오월의 봄, 2023. 106-109

[7] 사라 아메드, 같은 책, 106-109

[8] 이제 개인전 《밤의 유산》, 2024. 12. 09 - 2025. 1. 19.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전시실 1, 2.  핸드아웃

[9] “Experience discloses beneath objective space, in which the body eventually finds its place, a primitive spatiality of which experience is merely the outer covering and which merges with the body’s very being.” Maurice Merleau-Ponty, Phenomenology of Perception. Translated by Colin Smith. New York: Routledge. 1955

[10] 박소현, 「이불 재고: 메두사의 웃음 또는 괴물 변신의 정치학」, 『이불-시작』. 서울시립미술관, BB&M, 미디어버스, BOM DIA BOA TARDE BOA NOITE 공동 출판, 2021. 135-145

[11] 최민, 「음울한 시대의 알레고리」, 2004. 『글, 최민』, 2021, 파주: 열화당. 340-360

[12] 이제 개인전 《밤의 유산》, 작가와의 대화, 2025년 1월 18일,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전시실, 서울

[13]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최성만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2007. 184-189

[14] 발터 벤야민, 같은 책, 184-189

[15] 이제, 〈그리는 마음〉, 2024.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텍스트. 20분 38초 발췌.

[16] 사라 아메드, 같은 책, 183-219

[17] 백지숙,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기획의 글, 2016

[18] 존 버거, 「혁명적인 삭제: 막스 라파엘의 《예술의 요구》」, 『풍경들: 존 버거의 예술론』, 톰 오버톤 엮음, 신해경 옮김. 열화당, 2019. 74-86

[19] “We must define thought in terms of that strange power which it possesses of being ahead of itself, of launching itself and being at home everywhere, in a word, in terms of its autonomy.” Maurice Merleau-Ponty,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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