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도착했다.
김정현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어디까지 우리의 일이 될 수 있을까. 이상한 질문이다. 그림에는 그것을 그린 작가가 존재한다.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그림에 직접 선을 그리고 색을 입힌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림 그리기는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라는 주어도 수상하다. 우리라는 말을 대뜸 던지면서 이 글은 작가와 필자 두 사람을 뛰어넘는 독자들을 슬쩍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작가 이제의 관객인 독자들 중에는 저 질문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미 생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언제나 고독하게 신화화된 화가의 삶보다도 우정의 일상을 살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종종 가까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연과 서연>(2021)에서 눈초리가 닮은 두 조카와 고양이는 한껏 편안한 자세로 서로를 끌어안고 이쪽을 바라본다. <산책>(2021)에는 해가 이글이글 더운 날에도 지겹지 않게 대화의 온기를 나눴을 친구의 얼굴이, <당분간>(2021)에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는 자세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누군가의 얼굴이 비친다. 초상화의 주인공들이 한참동안 모델을 섰는지, 어느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해서 옮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초상화는 그것이 특정한 존재에 귀속된 이미지라는 차원에서 대상과 필연적으로 결부된다. 누군가 주문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자유롭게 취한 화재(畫材)일지라도 초상화는 피사체에게 이미지의 공동의 주인이 될 것을 요구한다. 모델이 됨으로써 그림의 제작에 참여하게 되는 작업들과 달리, 시제를 곁들여 헌사한 <나의 친구들에게>(2019-2021)와 같은 그림은 누군가를 편지의 수신인과 같은 입장으로 작업에 연루시킨다. 내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려지는 그림은 비록 내가 그것을 엽서나 편지처럼 소유할 수 없을지라도 나에게 전달된 내 수신함 속의 메시지이다. 초상화도, 누구에게 바치는 것도 아닌 이제의 그림에서는 시선의 소실점이 기묘하게 흐려진다. 한강, 하이웨이, 웅성이는 밤, 들판, 습지, 인왕산, 공항. 어쩐지 광대하고 개방된 공간이 자주 등장하고, 장소는 세부 묘사가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거의 지워져있다. 하늘과 땅이 색감과 밀도의 구분 없이 흩날리며. 긁히고 스쳐지나가는 붓질과 물감의 거친 겹침으로 표현된다. 이로써 그림 밖에서 안을 보는 두 주체-사후적으로 장면을 재구성하는 작가와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의 안락하게 분리된 신체적 공간감이 무너진다. 이제의 그림에서는 개인의 관념을 정확하고 충실히 전달하려는 표현적 욕구보다, 밤의 산책길과 같은 일상적인 시공간에서 그가 친구와, 동네에서, 별 일 없는 날에 함께 느꼈던 대기의 분위기와 말로 옮기기 어려운 벅차오르거나 슬픈 서로의 감정을, 그림이라는 매체를 기록 수단으로 가진 자로서 가능한 옮겨 두려는 듯한 소박함이 종종 느껴진다. 상징적 해석이나 분석적 설명보다 강력한 시각적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러므로 흩어진 소실점의 정체를 일인칭의 주관성이나 삼인칭의 객관성보다 너와의 관계 속에 있는 이인칭으로서의 나를 음각으로 표상한 것에서 찾아본다. 이제의 개인전 《회화 기타 등등》(2021)에서 그림은 사방의 깨끗하고 하얀 벽이 아니라 텅 빈 중앙을 가로지르며 창살같이 얽힌 가는 나무 기둥에 걸렸다. 작가 김연세가 이번 전시를 위해 <00을 위한 벽>(2021)을 만들었다. 크기도 비율도 다양한 그림들은 크게 세 묶음으로 나뉜 나무 뼈대를 벽 대신 얼기설기 채운다. 벽면에 견고하게 부착되지 않고 거의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한 그림은 쉽게 움직이고 떼어질 것만 같다. 일괄적으로 수평 높이를 맞추지 않고 제각각의 높이에서 등을 맞대게 건 그림들은 액자 없이 게시된 캔버스 프레임의 뒷면을 정면과 함께 보여준다. 엷게 바른 물감이 탁하게 겹쳐진 회색과 분홍의 색조가 미묘한 통일감을 주는 이십 여점의 그림은 몇 점씩 뭉치거나 흩어져 있는데, 이미지 사이의 눈에 띄는 서사적 연결고리는 제공되지 않는다. 그림들은 무엇보다도 물리적으로 얽혀 있다. 친구, 기억, 풍경, 대화, 감정과 같이 그림의 소재가 된 그 어떤 것도 유일무이하고 자족적인 ‘작품’으로서 고립되지 않게 하려는 듯이, 작품화 이전의 비(非) 개인적인 삶을 유지하려는 듯이 말이다. 이제의 그림이 화면 안팎의 시선과 풍경의 직조를 통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회화의 공동성을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그림에 연루된 ‘공동체’는 그 몸이 좀 더 시각적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인식 가능해진다. 존재론이 필연적으로 나와 우리에 관한 것이라면, 인식론은 그 외부 시점의 사유를 허용하고 심지어 전제로 삼는다. 작가는 그림 이후, 그림을 함께 보고 그림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구상한다. 《회화 기타 등등》에서 ‘기타 등등’에 해당하는 협업의 결과물은 이런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김연세의 공간 디자인부터 최태현의 사운드 <Suite 1 - Pebble, Silk, Teeth, Owl>(2021), 강기석의 안무 <불꽃은 우리를 흔들리게 한다.>(2021, 출연: 강기석, 유지영, 이민지), 김소은의 기록 영상 <다큐멘트_페인팅 기타 등등_이제_산수문화_21.07.27-21.08.22>(2021), 그리고 쇼윈도에 필사된 미학자 양효실의 이제의 그림에 관한 글까지. 그림은 먼저 완성되었고, 각기 다른 매체를 가진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하고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각자의 작업을 진행했다. 이들은 중간 과정을 서로 공유하며 서로의 결과물에 영향을 미친다. 협업은 이제의 개인전이라는 형식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작업은 회화를 대표로 삼은 뒤에 기타 등등으로 호명된다. 이제가 작가이자 기획자 역할을 하면서 ‘개인전’의 개인-주체성과 협업 창작물에 관한 크레딧의 문제가 복잡해지만, 서로가 이해하고 동의하는 한 창작-소유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창작-대화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대화인가? 대화는 작가 이제의 말 걸기에서 시작되었다. ‘나’와 ‘너’ 또는 ‘나’와 ‘너희들’의 대화. 말 걸기는 대꾸하고 다시 답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최초의 ‘나’와 ‘너’의 고정된 위치를 뒤섞고 변환하며 여러 겹으로 확장시킨다. 이를 통해 대개의 경우 ‘나’와 ‘너’는 다수의 ‘나’와 다수의 ‘너’로 이루어진 우리 또는 그들의 집단이 된다. 그러나 이제의 대화와 협업에서 특징적으로 불거지는 것은 ‘나’가 마지막까지 한쪽 편에 고정된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행정적 편의의 결과가 아니면서도 이렇게 유지된 ‘개인전’의 형식은 대화가 야기하는 질문을 결정적으로 특정 짓는다. 즉, 질문은 단지 어떻게 ‘우리가 될 것인가’가 아니다. 그보다 앞선 시제에서, ‘나는 어떻게 너를 대할 것인가’, 그리고 한발 더 앞서,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회화 매체의 역사에서 지나치게 익숙한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여기서 그러나 모더니즘 회화에서처럼 자기 환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단지 사운드, 신체 퍼포먼스, 글과 같은 다양한 매체를 끌어들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다른 매체와의 병치로 인해 자기 환원적 고리에 균열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협업 작업 중에서도 사운드와 퍼포먼스는 공간을 총체적으로 장악하고 분위기를 변화시키는데, 끊임없이 루프 재생되는 최태현의 음악은 이제의 그림에 관객을 편안하게 몰두하게 하더니, 무용수들의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동안에는 다시 그림으로부터 눈을 떼어내는 요소가 된다. 그림을 배경 삼은 무용수의 퍼포먼스란 그림과의 강력한 매개 지점이 있지 않고서야 상투적인 장면으로 흐르기 쉽다. 기둥에 도열한 그림, 그림 사이의 공간과 기둥 사이의 통로를 주 무대로 약 30여 분 동안 집중 관람 해야 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동안에 그림은 시선의 초점에서 물러난다. 세 사람이 그림 주변을 천천히 배회하다 결코 시선을 맞추지 않고 서로의 몸을 밀어내면서도 연결되면서 네 발로 걷고 기댄다. 가끔 누군가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그림이 있는데 그마저도 배경과 닮은 색조로 은근하게 나타나는 탓에, 그림은 멀찍이서 배경으로 남아 다소 흐릿한 회색조의 인상으로 비칠 뿐이다. 퍼포먼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서 누군가 맨발을 드러내고 바닥을 걷는 소리였다. (앤딩은 그가 신발을 신고 전시장을 나서는 것.) 살갗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는 서늘한 전시장 바닥의 감각을 전경화한다. 퍼포먼스는 그 신체적 현전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급격히 몰입시키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며 그것과 어우러진 그림의 인간주의적인 아우라를 극대화시키기 십상이지만,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떠오른 헐벗은 드러냄이 인간주의의 이면을 살피게 한다. 발바닥과 콘크리트 바닥이 마찰하며 서로를 상기시킬 때, 인간적이고 산업적인, 육체적이고 사물적인 상반된 감각이 생경하고도 생생하게 뒤얽힌다. 그리고 의도치 않은 해프닝으로서, 스치고 엉키고 비틀거리는 몸에 그림이 부딪혀 덜컹거리는 순간. 이제의 그림 속 온기의 세계가 산업용 물감의 익명적 출처와 마찰하듯 흔들린다. 불현 듯 그림 속 얼굴들 주변의, 인간의 인상을 뒤덮은 흩날리는 물감들, 때로 먼저 그린 그림을 지워버릴 듯이 쏟아진 얼룩 같은 흔적과 비정형의 색면이 부각된다. <하이웨이>(2021)에 풍경을 덮고 말 칸처럼 떠오른 청회색 구름, <우리의 춤은 늘 뜻밖에 시작되지>(2021)에서 불꽃이나 먼지처럼 일어나 먼 곳을 더욱 더 흐려놓는 ‘던져진 물감’-이 그림은 심지어 뒷면의 캔버스를 감춰 가리듯이 이중으로 부착됐다, 그리고 이미 거의 추상화된 화면이 세로 선으로 한 번 더 지워진 <나이트 로즈>(2021)까지. “그림을 그리는 일은, 이미지를 훼손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는 이제의 말은 그의 그림으로 어떤 얼굴들을 기억하게 된 사람에게 의외로 들렸다. 여기서 이미지를 훼손한다는 말이 회화에서의 재현적 과제를 포기하거나, 구상적 형상 위에 물감을 덧입힌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또한 이미지를 훼손한다는 것이 대상을 불경해한다거나 더 이상 애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닌 것 같다. 이미지라는 말로 그는 우선 무언가 고정된 것들을 떠올리는 지도 모른다. 단일하고 획일적인 것들 - 정체성, 규범, 사건, 절망, 냉소, 때로는 희망까지. 단단한 만큼 순식간에 얼어붙어 퇴색한 과거가 되고 마는 것들. 작가는 오랫동안 붙들어온 회화를 다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는 회화의 가능성을 기억하는 힘과 지우는 힘 중 어느 하나로 규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흔들고 변화하게 하는 힘에서 다시 발견하려는 것은 아닌가 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반사하고 모든 것을 투영하고 모든 것을, 그래, 모든 파장을 굴절시키고 이어나가면서 목을 길게 빼고, 긴 울음소리를 내는 순간에, 뜨겁고 붉게 온 몸을 휘감는 것은, 흐르는 것, 순환하는 것, 분출하고 닿는 것.” 숨이 숲이 되고, 숲이 다시 바람이 되듯이.** * & ** 이제의 그림 <나의 친구들에게>(2019-2021)에 적힌 시를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