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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애도 연습 그림

리타 이연숙
 

   고백컨대 이제의 작업실에 방문해 ‘화가’로서 그의 20년을 청취하고 나서야 나는 그의 작업 전체가 다름 아닌 상실에 대한—사는 내내 지속되는—애도 행위 같다는 생각에 미쳤다.    이는 “뛰어난 기량”의 화가가 자신의 일관된 스타일이라는 영토로부터 정주와 탈주를 반복하는 이유를 부드럽게 관통하는 통찰이었다. 알다시피 상실과 애도의 유명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상실 대상은 우리 내부에 복구도 회복도 불가능한 상처를 남긴다. 우리는 바로 그런 상처의 형태에 따라 기꺼이 변형되길 택한다. 그런고로 ‘대가’로서 완결과 완성을 향한 통달 대신 자발적 상실과 아마추어리즘적 흥분과 재미를 훈련하는 화가의 지향/태도에는 어쩌면 상실 대상과의 오랜 동일시가 있으리라. 늘 그렇지는 않지만 주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타자와의 거리 상실은 윤리가 출현하는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에서부터 ‘고향 도시’의 재개발과 지난 십수년간 아무렇지 않게 벌어진 한국 사회의 사회적 참사‘들’, 죽음‘들’이라는 외상과 그에 따른 우울은 그의 그림에서 밑색으로 존재하는 근본적인 참조다. 이런 맥락을 살피자면 이제의 그림은 단순한 감상주의적 멜랑콜리의 표현이 아닌 공동체적 상실의 정동을 포착/보존/운반하는 아카이브다. 그는 분명 그림이란 우회적인 경로/수단/방법을 통해 그 모든 죽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작업실에서 우린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무수한 죽음들에 대해서도. 그의 작업실 방문에는 인스타그램 릴스에서 캡처한 것만 같은 저화질 이미지가 붙어 있었다. 포항 어느 해안에 떠밀려온 붉은바다거북 사체를 매장하는 마을 주민이라고 했다. “영상에서 한 주민은 해변 모래를 깊이 판 뒤 붉은바다거북을 묻고, 굵은 돌을 골라내 부드러운 모래로 덮어줬다. 이때 거북의 머리는 바다 쪽을 향했는데 황 씨는 "머리를 바다 쪽으로 둬야 영혼이 바다로 간다는 말이 있다. 죽어서도 바다로 향하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생명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야 뻔하고 시시하다. 그러나 자본의 가속과 팽창이란 목적 아래 의미 없이 갈려 나가 애도 대신 ‘폐기’되는 (우리 ‘같은’) 생명과 과연 어떻게 함께 울고 함께 묻힐 것인지를 따져 묻기란 괴롭고도 외로운 문제다. 당연하게도 죽음 이후에도 애도는, 세계는, 삶은 계속된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이제의 관심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림은 그런 삶을 위한 가능한 하나의 대답이다.이와 같은 기본적인 관점을 장착하고 <세계는 계속된다> 연작을 살펴보자. <세계는 계속된다>는 비록 연작이란 형식 아래 묶여 있긴 하지만 크기를 제외하고는 소재적/주제적 유사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이미지 모음의 단속적 연쇄처럼 보인다. 이제의 그림과 관련해 줄곧 언급되어 왔던 구상과 추상이라는 미술사적 범주는 이와 같은 무질서한(!) 이미지 나열에 개입하기 위한 안정적인 입구처럼 기대되나 이는 아쉽게도 곧 오인/오해/오판으로 밝혀진다. 왜냐하면 이들 연작은 일정한 바탕을 올린 다음 화면에 사건적/즉흥적 요소를 더해 나간다는 일정한 작업 순서를 따르기에 재현적인 형상 유무를 기준 삼는 회화 장르 분류로는 기실 이들 간의 차이가 오직 진행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상과 추상이란 잣대는 이제의 연작에선 전혀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다. 더욱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조차 구상과 추상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기에 개별 이미지는 마치 간밤에 꾼 꿈과 같이 사실(기억)과 상상이 혼란스레/자유롭게 섞여 연출된 허구적/환상적 장면처럼 보인다. 잔상처럼 흐릿하게 눈에 비쳤다가 사라지는 얼굴들/장소들. 모든 꿈이 그렇듯이 깨고 나면 오직 분위기/질감/느낌만이 베개 주변에 흩어져서 남는다. 이제의 연작은 그런 부재의 잔여/파편/잔해를 “그리기와 지우기”의 변증법적/반복적 운동으로 붙잡으며 일명 “더러운 회색”의 ‘중간계’적 공간으로 향하는 통로를 개방한다. 어쩌면 이제의 작업 태도 전반을 요약하는 용어인 ‘중간계’는—티벳 불교의 ‘중음계(bardo)’처럼—온전히 의미/언어로 승화/번역되지 못한 ‘나머지’의 육체적인/촉각적인/물질적인 정동 에너지를 보존하는 추상적인/유토피아적인 공간이다. 또한 처음부터 이분법적 분류체계의 작동을 불능으로 만드는 판단 중지의 공간이자 미완과 미결의 상태에 머무르길 택하는 퇴보와 피난의 공간이다. 이런 “[주체의] 능동성과 [타자가 주체에게 요구하는] 수동성이 서로를 밀치고 뒤엉키며 전개되는 회색지대”의 ‘애매모호함’이야말로 이제의 연작이 지향하는 ‘회화적임’의 핵심이다. 촉각적인 질감/색감/묘사로 풍부한 이미지를 가리키는 ‘회화적임(painterly)’이란 표현은 어떤 관점에선 멸칭으로 대상이 ‘유사(pseudo)’ 회화일지언정 ‘진짜’ 회화는 아니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유연한/가변적인/확장적인 회화 경험은 관객에게—그리고 누구보다 작가 본인에게—회화에서 삶을 그리고 반대로 삶에서 회화를 발견하게 만드는 정동적/직관적/육체적 차원의 진실을 제공한다. 이는 화이트큐브를 배경으로 미끈한 액자에 걸린 ‘진짜’ 회화로선 차마 구하기 어려운 그런 생(生, raw)의/낮은(low)/아마추어적인 만남의 순간이다. 한편 여기서는 길게 다루지 못하지만 이번 연작에는 ‘전형적인’ 추상처럼 보여 그림보단 ‘페인팅’이라 불러야 좋을법한 이미지도 있다. 물감의 물성과 캔버스라는 물리적 지지체의 특성이 중력과 같은 물리법칙과 시간/공간이란 조건에 따라 우연적/즉흥적/가변적으로 만들어 내는 각종 움직임은 일견 추상 미술에 대한 전유/패러디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는 각각의 요소가 만들어낸 즉흥 연주, “잼(jam)”의 기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유사 추상의 시도/실험은 연작 전체에 내용의 부재를 통한 리듬을 제공한다. ‘회화적임’이 이제의 연작이 생성하는 일상과 예술의 ‘사이’ 매개/통로/공간을 암시하는 표현이라면 이번에는 ‘연작’이란 형식 자체를 통해 같은 말을 해보자. <세계는 계속된다> 연작은 정방형의 크기로 통일되어 마치 인스타그램 피드에 무심하게 올려놓은 개인적인 짤/밈/‘캡처’ 모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알다시피 디지털 환경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인 캡처란 전체 이미지에서 특정 이미지를 추출하거나 혹은 연속 이미지에서 정지 이미지를 분리하는 행위와 그 결과를 의미한다. 이제 같이 장인적인 의미에서 ‘화가’라는 이름이 꼭 들어맞는 작가에게 ‘딸깍’ 소리만으로 간단히 스크린—세대에 따라서 이는 ‘리얼 월드’조차 아니다!—을 무한 복제하는 디지털 기술을 언급하는 문장이 어떻게 읽힐지는 모르겠다. 본래 1인칭 시점에서만 경험되고 소유되던 화면을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공유하는 시각적 단위로서 캡처는 분명 오늘날 거의 저급한 레벨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실질적 매개이다. 이를테면 ‘증거 자료 첨부’라는 이름으로 길게 이어지는 카카오톡 대화 캡처를 떠올려 보라. 아무리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이런 조건에서 캡처는 비밀이란 절대적 타자를 고작해야 ‘좋아요’(아니면 ‘싫어요’) 누르기 좋은 정보의 위상으로 추락시켜 양자 간의 차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세상 모든 비밀에 동일한 사보타지를 수행한다. 그런데—부지런한 ‘증거 자료 첨부’를 제외하고—캡처라는 동전에는 분명 ‘다른’ 양면도 있다. 이를테면 캡처는 디지털 환경에서 마주치는 너무나도 우연적인/결함(glitch)적인, 그러므로 거의 마법적인 접촉/접속의 순간을 보존하고 기록한다. 우리는 우리가 인터넷을 하는 ‘진짜’ 이유가 바로 거기 존재했단 사실을 ‘오래된 유명한 캡처’를 통해서만 치매처럼 기억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우리는 ‘오래된 유명한 캡처’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터넷 친밀감의 일시적 사건을 이미지 확장자라는 통화(currency)의 형식으로 경화하고 유통하는 캡처를 통해 여느 영화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름대로 캡처 ‘내부에서’ 개별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캡처를 통한 간접 경험의 부드러운 자유는 문학의 근본 기능과 마찬가지로 ‘너’와 ‘나’의 위치 변경을 가능하게 한다. 이제의 연작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경험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가 ‘캡처’한 그의 세계를 이루는 시각적/감각적/정동적 레이어들은 캔버스란 스크린에 부드럽게 펴발린다. 구체적인 사건/형상/정보의 부재는 오히려 관객의 기억/경험/상상을 자극하는 틈새/침묵/공간으로 기능한다. 이런 식으로 그림은 삶을, 애도를, 세계를 지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꺼이 자신을 ‘변형한다’. 마지막으로 연작의 정방형에 대한 코멘트. 알다시피 정방형은 인스타그램 피드를 연상하게 하나 <세계는 계속된다: 강>에서처럼 추모 집회 현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포스트잇의 사이즈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을 통해 연작은 관객에게 정방형을 일상적 애도의 형식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요청하고 있다. 틀림없이 이는 인스타그램 피드의 무감동한 평등함에 대항하는 ‘회화적임’의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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