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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를 산책할 때 리뷰 아트인컬처 × 2021.09

​장승연
 

기타 등등의 실험 현장

  이제의 붓은 종종 무엇을 그리기보다는 하얗고 반듯한 사각의 캔버스 위를 어떻게 흐트러뜨리는가에 집중하는 것 같다. <초가 있는 풍경>은 촛불의 은은한 불빛과 까맣게 피어오르는 그을음이 뒤섞인 혼탁한 공기를 포착하듯, 거친 붓 자국이 화면을 헝클어트린다.   <한강>, <인왕산>, <들판>처럼 이미 제목에서 ‘풍경’임을 암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망막에 나무와 풀과 흙과 물인 듯 맺히던 형상은 이내 물감과 붓이 지나가거나 문질러진 자국과 얼룩으로 흩어진다. <웅성이는 밤>의 ‘웅성이는’ 청각적 심상은 마치 긁어 나가듯 거침없이 캔버스를 훑고 지나간 붓의 흔적과 색채로 대체된다. 이제의 회화에서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특정한 기표로 고정되지 못하고 미끄러져버리는 기호로 남는다. 그 장면은 작가의 눈에 포착된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풍경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사람이 나무가 되고 풀이 되었다가 흙이 되고 흔적과 얼룩 같은 회화의 진득한 잔여물로 자꾸만 미끄러지면서 불완전한 틈과 틈이 생겨나는 회화의 화면은 점차 위태로워진다. 그 틈들은 그의 회화를 명확한 언어로 설명하기 힘들게끔 자꾸만 방해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무수한 말들이 동시에 부유하며 낯선 감각을 발동시키는 회화적 경험을 야기한다. 평론가 양효실은 이제의 그림에 주를 이루는 회색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거침없이 붙인다. 물론 이제의 회화가 선사하는 낯선 경험을 즐기는 이상, 그 ‘더러운’은 ‘깨끗한’의 반대말이 아니다. 관습적 화면을 거부하는 회화적 표현의 확장성을 포착하는 강렬한 형용사다.                                                                           

  그리고 회화는 어딘가에 걸린다. 이제에게는 그것이 기호의 장으로서 ‘화면’만큼이나 흩트려 보고 싶은(혹은 새로이 구축해보고 싶은) 회화의 관습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본다’는 회화의 시각적 전제를 ‘느낀다’는 공감각적 경험으로 확장해볼 수 있는 형식적 전환일 수도 있다. 그의 개인전이 열린 산수문화는 외부를 향해 뻥 뚫린 전면의 유리창에서부터 이미 화이트 큐브의 완결성을 져버린 공간이다. 그곳에 이제의 회화는 ‘다르게’ 걸려 있다. 단단한 기둥이라기엔 다소 불완전해 보이는 구축물이 한쪽 귀퉁이에서 다른 쪽 모서리를 향하며 공간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이제의 회화는 하얀 벽이

아니라 이 구조물을 지지대로 삼고 그 위와 아래, 심지어 앞과 뒤에 걸렸다. 따라서 관객의 동선은 일정한 벽을 따라 반듯한 사각형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 사각형 내부의 빈 공간을 방향성 없이 이리저리 휘젓는다. 헝클어진 동선을 그리며 위아래의 그림을 보고 다시 옆으로 돌아가 앞뒤의 그림을 순서 없이 보다 보면 그림은 물론 그림과 그림 사이의 틈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원래는 눈에 띄지 말아야 할, 비어 있는 그 틈을 메우는 것은 사운드와 퍼포먼스다. 사운드는 관객의 동선에 박자를 심기도 하고, 그림의 틈과 틈 사이로 흐르다가 그림의 다듬어지지 않은 표면에 낯선 질감을 얹는다. 퍼포먼스를 펼치는 이들은 느릿한 사운드에 맞춰 그림과 구축물 사이의 작은 틈을 헤집고 몸이 들어갈 자리가 아닌 곳을 몸으로 차지하면서

그림과 그림 사이의 잉여 공간을 다양한 신체적 제스처로 점유해간다. 이 모든 장면은 캔버스의 화면을 불완전하게

동요시키던 그 틈이 전시라는 공간적, 환경적 요소로 확장하며 시작되었다. 그 결과, 전시는 회화와 회화를 둘러싼 ‘기타 등등’(전시의 기록과 그래픽 디자인부터 퍼포먼스, 사운드, 글까지) 모두가 들썩이는 흥미로운 실험 현장이 되었다. 그런데 여럿의 협업으로 완성된 이 전시는 ‘총체적’이라는 단어를 슬쩍 비껴가며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해체적 경험으로 다가온다. 조화롭게 완결된 총체로서의 전시를 비껴갈 수 있다면, “흔들림과 어긋남, 결핍의 감각”을 일깨우는 낯선 전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림의 작고 위태로운 틈으로부터 시작된 것일 게다. 바로 흰 벽을 벗어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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